후삼국을 통일한 왕건도 크게 패한 적이 있습니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에 무너졌고, 신숭겸과 김락이 전사했습니다. 왕건은 가까스로 빠져나왔습니다.

그런데 9년 뒤인 936년, 후삼국의 마지막 전쟁에서 이긴 쪽은 왕건의 고려였습니다. 패배했던 왕건은 어떻게 통일의 주도권을 잡았을까요? 전투의 승패와 지역 세력의 협력, 후백제의 내분을 함께 보아야 답이 나옵니다.

이 글의 핵심

왕건은 모든 상대를 전쟁으로 없애지도, 포용만으로 통일하지도 않았습니다. 고창에서는 싸워 이겼고, 견훤과 경순왕은 받아들였으며, 남은 후백제는 군사적으로 제압했습니다. 이 서로 다른 과정을 구분하면 후삼국 통일의 흐름이 보입니다.

1. 918년 고려 건국, 통일은 아직 멀었다

왕건은 본래 궁예의 휘하에서 활동한 장수였습니다.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왕이 바뀌었다고 각 지역의 세력이 모두 한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건국 초기에는 반란이 일어났고, 고려를 떠나 후백제에 붙는 지방 세력도 있었습니다. 왕건에게는 후백제와 싸우는 일만큼이나 자신의 편을 유지하고 늘리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각지에 기반을 둔 호족은 토지와 군사력을 갖춘 세력이었습니다. 왕건은 이들과 혼인 관계를 맺거나 귀부한 인물을 우대하는 등 관계를 넓혀 갔습니다. 귀부란 다른 정치 세력에 들어가 그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혼인 정책을 통일의 유일한 비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관계를 맺는 것과 전쟁에서 버티는 것은 별개의 과제였고, 당시의 후백제는 고려를 크게 위협할 수 있는 강국이었습니다.

2. 공산의 패배와 고창의 승리는 무엇이 달랐나

927년 공산 전투의 승자는 견훤의 후백제였습니다. 공산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입니다.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려고 나섰다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통일의 결과만 알고 보면 놓치기 쉽지만, 고려가 처음부터 전쟁을 압도했던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전환점은 930년 고창 전투였습니다. 여기서 고창은 오늘날 전북 고창이 아니라 경북 안동 일대를 가리킵니다. 이 전투에서는 고려가 후백제에 크게 이겼습니다.

승리에는 고창의 김선평·권행·장길 등 지역 세력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왕건은 공을 세운 이들을 포상했습니다. 호족과의 관계가 단순히 왕실의 혼인 명단에만 남은 것이 아니라, 실제 전투를 뒷받침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전투의 효과는 전장 밖으로도 이어졌습니다. 승리 이후 안동·청송 일대의 여러 고을과 동해안 지역의 성들이 고려에 귀부했습니다. 지역의 협력이 승리에 보탬이 되고, 승리가 다시 더 많은 지역의 합류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만 고창에서 이겼다고 후백제가 곧바로 멸망한 것은 아닙니다.

3. 견훤이 고려로 왔는데, 왜 전쟁은 계속됐을까

935년 후백제 내부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습니다. 견훤은 그곳을 탈출해 고려에 귀부했습니다.

왕건은 오랫동안 맞서 싸웠던 견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를 상보라고 높여 부르고 거처와 식읍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서 포용은 막연히 성품이 좋았다는 평가보다, 적대했던 인물에게 실제로 지위와 대우를 보장한 조치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때 구분해야 할 것은 견훤 개인의 귀부와 후백제 국가의 항복입니다. 견훤은 고려로 왔지만, 후백제는 신검 아래 계속 존재했습니다. 후백제를 세운 왕과 그 나라의 현 지배자가 서로 다른 편에 서게 된 것입니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이면서 후백제의 내분을 고려에 유리한 상황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의 영토와 군대까지 저절로 손에 넣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마지막 전쟁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4. 신라의 귀부는 후백제의 멸망과 달랐다

같은 해인 935년,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귀부했습니다. 신라 조정은 약해진 국력과 주변 정세 속에서 나라를 유지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고, 경순왕은 결국 고려에 나라를 넘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왕건은 경순왕을 우대하며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신라 왕조는 끝났지만, 고려가 마지막까지 경주를 공격해 왕성을 함락시키는 방식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서 신라의 통합은 후백제의 정복과 구별됩니다.

그렇다고 후삼국 전체가 전쟁 없이 통일되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신라가 고려에 들어간 935년에도 신검의 후백제가 남아 있었고, 고려와 후백제는 이듬해 대규모 전투를 벌였습니다.

5. 936년 일리천, 마지막은 군사적 승리였다

936년 일리천 전투는 지금의 경북 구미 일대에서 벌어졌습니다. 왕건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했고, 고려에 귀부한 견훤도 정벌에 참여했습니다.

전투에서는 후백제의 일부 장수들이 고려에 항복했고, 고려군의 공격으로 후백제군이 크게 패했습니다. 신검은 이후 항복했고 후백제는 멸망했습니다. 이것이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완성된 과정입니다.

따라서 935년은 신라가 고려에 들어간 해, 936년은 후백제가 무너져 통일이 완성된 해로 나누어 기억해야 합니다. 견훤을 받아들인 포용과 신검 정권을 무너뜨린 군사 행동은 서로 연결되지만,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연도사건과 결과
918년고려 건국 — 통일이 아니라 새 정권의 출발
927년공산 전투 — 고려 패배
930년고창 전투 — 고려 승리, 여러 지역의 귀부
935년견훤의 고려 귀부 — 신검의 후백제는 존속
935년경순왕의 고려 귀부 — 신라 왕조 종료
936년일리천 전투 승리와 신검 항복 — 후삼국 통일

정리: 싸우는 힘과 함께할 세력을 모두 확보했다

왕건의 통일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고창과 일리천에서 이길 수 있었던 군사력, 지역 세력과 맺은 협력 관계, 그리고 후백제의 내분과 신라의 귀부를 받아들이는 정치적 대응입니다.

왕건의 장점만으로 모든 결과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후백제 내부의 갈등과 신라의 약화 역시 중요했습니다. 왕건은 이런 변화 속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전쟁과 새로운 세력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함께 사용했습니다.

통일은 고려 한편의 힘이 커진 과정인 동시에, 여러 세력의 소속과 관계가 바뀐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왕건의 다음 과제도 남았습니다. 통일을 함께 이룬 호족들을, 이제 하나의 나라 안에서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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