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상경성에는 황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까지 폭 약 110m의 주작대로가 뻗어 있었습니다. 선왕의 중흥 뒤 대이진·대건황·대현석대로 이어진 9세기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기록될 만큼 융성했던 배경은 이런 수도와 행정망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해동성국을 선왕 한 사람의 영토 확장으로만 외우면 발해가 강해진 과정은 보이지 않습니다. 문왕이 제도와 수도의 틀을 만들고, 여러 왕대에 걸쳐 지방 통치와 대외 교통이 맞물렸을 때 비로소 넓은 영역이 실제로 움직이는 나라가 됐습니다. 이 글에서는 상경성 유적을 중심으로 그 과정을 살펴봅니다.

먼저 기억할 세 가지
  • ‘해동성국’은 발해의 공식 국호나 당이 내린 칭호가 아닙니다.
  • 상경성의 도시 구조는 발해의 행정력과 문화 수준을 보여 주는 물적 증거입니다.
  • 문왕의 체제 정비, 선왕의 중흥, 이후 왕들의 번영을 하나의 흐름으로 봐야 합니다.

1. 해동성국의 번영은 110m 주작대로에서 보인다

문왕은 756년 무렵 상경 용천부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780년대 후반 한때 동경 용원부로 천도했지만, 성왕이 794년에 다시 상경으로 돌아온 뒤에는 발해가 멸망한 926년까지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상경성은 외성 안 북쪽 중앙에 궁성을 두고 그 남쪽에 황성을 배치한 계획도시였습니다. 궁성에는 주요 궁전터가, 황성의 동·서 구역에는 관청으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남아 있습니다. 황성 남문과 외성 남문을 잇는 주작대로는 폭이 약 110m에 달했습니다. 말을 탄 사절과 수레, 사람들이 오가는 국가 중심축을 이 정도 너비로 설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발해가 동원할 수 있었던 행정력과 도시 계획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성 안에는 주거지와 시장, 사찰이 자리했습니다. 상경은 왕이 머무는 궁궐만 있는 공간이 아니라 정치·경제·종교가 함께 작동하는 수도였습니다. ‘해동성국’이라는 추상적인 표현이 성벽과 도로, 궁전터와 절터라는 구체적인 모습으로 바뀌는 곳이 바로 상경성입니다.

2. 장안성을 참고했지만 그대로 복사하지 않았다

상경성의 격자형 도로와 궁성·황성의 배치는 당의 수도 장안성을 참고한 흔적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상경을 장안의 축소판으로만 보면 발해의 선택이 사라집니다.

상경 궁전의 회랑은 뒤쪽 영역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이는 장안성과 다른 배치입니다. 궁전 유적에서는 추운 지역의 생활환경에 맞춘 온돌 시설도 확인됐습니다. 발해는 선진 도시계획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연환경과 통치 방식에 맞게 공간을 바꿨습니다.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되 자기 현실에 맞춰 재구성한 태도는 발해의 관제와 수도에서 공통으로 드러납니다.

3. 상경을 움직인 제도는 문왕 때 다듬어졌다

무왕이 영토를 넓히고 당의 등주를 공격하며 발해의 존재를 드러냈다면, 문왕은 당과 관계를 회복하고 국가 운영의 규칙을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문왕은 738년 6월 당에 사신을 보내 『당례』·『삼국지』·『진서』·『삼십육국춘추』를 베껴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당 현종은 이를 허락했습니다. 이때의 『당례』는 당시 최신 국가 의례서인 『대당개원례』로 봅니다. 좋은 물건만 들여온 것이 아니라 나라를 운영하는 의례와 역사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려 한 것입니다.

발해는 선조성·중대성·정당성의 3성과 충·인·의·지·예·신의 6부를 두었습니다.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는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이 좌상·우상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고, 좌·우사정이 6부를 세 부씩 나누어 관할했습니다. 기본 틀은 당에서 배웠지만 관청 이름과 권력 구조는 발해식으로 바꾼 셈입니다.

교육도 국가 운영과 연결됐습니다. 발해의 주자감은 당의 국자감에 대응하는 유교 교육기관으로 주로 왕족과 귀족의 자제를 가르쳤습니다. 발해 왕들은 학생들을 당 수도의 태학에도 보내 옛 제도와 당시의 제도를 배우게 했습니다.

4. 5경은 15부 위에 놓인 조직이 아니었다

발해의 지방 제도는 흔히 ‘5경 15부 62주’로 외웁니다. 이 숫자만 나란히 기억하면 5경 아래에 15부 전체가 놓인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지방 행정의 근간은 15부였고, 그 가운데 중요한 다섯 부에 5경을 두었으며, 각 부가 아래의 주를 관할했습니다.

  • 상경 용천부
  • 중경 현덕부
  • 동경 용원부
  • 서경 압록부
  • 남경 남해부

이 체제가 언제 완성됐는지는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문왕대 후반에 부·주·현제와 5경제가 성립하고, 선왕대의 영역 팽창을 거쳐 9세기 전반에 5경 15부 62주 체제가 갖춰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입니다.

핵심은 숫자가 아니라 기능입니다. 15부와 그 아래 주들이 전국의 행정망을 이루고, 다섯 경은 중요한 지역 거점으로 작동했습니다. 신라의 지방 제도와 비교하고 싶다면 9주 5소경·9서당 10정은 어떻게 달랐을까?를 함께 보면 두 나라가 넓어진 영토를 묶은 방식이 더 선명해집니다.

5. 다섯 길은 동북아시아로 이어졌다

『신당서』는 용원·남해·압록·장령·부여를 각각 일본도·신라도·조공도·영주도·거란도와 연결해 기록합니다.

  • 일본도: 용원 동남쪽 연해를 거쳐 일본으로 이어진 육·해로
  • 신라도: 남해 방면에서 신라로 통하던 길
  • 조공도: 상경·중경에서 서경 압록부를 거쳐 당으로 이어진 수륙 교통로
  • 영주도: 상경에서 장령부를 거쳐 당의 영주로 이어진 육로
  • 거란도: 부여와 거란 방면을 연결한 길로, 구체적인 노선은 아직 분명하지 않음

이 길들을 오늘날의 포장도로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산길과 강길, 바닷길을 포괄해 발해가 주변 세계와 접촉한 방향을 나타내는 교통망에 가깝습니다. 대외 교통로와 국내 간선로를 따라 사절과 교역품 등이 오갔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발해 각지의 특산물 기록도 지역마다 다른 생산 기반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솔빈부의 말, 위성의 철, 현주의 베, 노성의 벼, 책성부의 된장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물산은 지방의 공납품이었고 일부는 대외 교역에도 활용됐습니다.

6. 선왕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왕대가 만든 전성기

문왕 사후 25년 동안 여섯 왕이 교체됐습니다. 최근에는 이 시기 전체를 오랜 내분으로 단정하기보다, 일시적인 내분을 거친 정체기로 이해하는 견해가 늘고 있습니다. 818년 즉위한 선왕은 이 정체에서 벗어나 중흥을 이끌었습니다.

『신당서』는 선왕이 해북의 여러 부락을 토벌해 영토를 크게 열었다고 기록합니다. 문왕대부터 정비된 지방 제도도 이 영역 팽창과 맞물려 전국적인 체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번영은 선왕과 함께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이진·대건황·대현석대까지 9세기의 전성기가 이어졌습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은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 정도로 풀이합니다. 발해의 공식 국호나 왕의 시호도, 당 황제가 내려 준 칭호도 아닙니다. 발해 멸망 뒤 11세기 북송에서 편찬된 『신당서』가 발해의 번영을 정리하며 쓴 표현입니다.

『신당서』는 발해가 학생들을 당의 태학에 보내 고금의 제도를 배우게 했다고 적은 뒤, 해동성국과 5경 15부 62주를 이어 서술합니다. 이 기록을 통해 발해의 번영을 정복 전쟁뿐 아니라 제도 학습, 도시 건설, 지방 통치와 국제 교류가 축적된 결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헷갈리기 쉬운 질문 세 가지

상경성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수도였나요?

아닙니다. 문왕이 756년 무렵 상경으로 옮겼다가 780년대 후반 동경으로 천도했고, 성왕이 794년에 다시 상경으로 돌아온 뒤 926년까지 수도로 삼았습니다.

『신당서』는 62주라는데 왜 이름은 60개만 나오나요?

『신당서』는 전체 수를 62주라고 적었지만 실제 목록에는 60주만 열거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요사』 등 다른 자료를 이용해 빠진 주의 이름을 보완하고 있습니다.

해동성국이라면 모든 백성이 풍요로웠다는 뜻인가요?

남은 자료는 주로 왕실·귀족·도시와 대외 관계를 보여 주므로 일반 백성의 생활 수준을 충분히 복원하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번영과 모든 주민의 균등한 풍요는 구분해야 합니다.

출근길 1분 기억법

“문왕이 제도와 수도의 뼈대를 세우고, 선왕이 중흥의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뒤이은 왕들이 9세기의 번영을 이어 갔다.”

상경성의 110m 주작대로와 5경 15부 62주, 다섯 대외 교통로는 그 번영을 실제로 움직인 구조였습니다.